돈키호테
작가-미겔데 세르반테스-
-흰날꽃별 -
2022.3.
돈키호테 동상과 풍차가 있는 곳 -제주여행 중에서- -수채화-
17세기 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사는
한 신사가 한창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를 너무 탐독한
나머지
정신 이상을 일으켜 자기 스스로
돈키호테 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 마을에 사는
뚱보로서 머리는 약간 둔한
편이지만 수리 타산에는 빠른
소작인
산초 판자를 시종으로 데리고
무사수업에 나아가 여러 가지
모험을
겪게 되는 이야기.
돈키호테는 환상과 현실이 뒤죽
박죽이 되어
기상천외한 사건을 여러가지로
불러 일으킨다.
사랑하는 풍차를 거인이라
생각하여
산초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습격해 들어 간다.
그 결과 말과 더블어 풍차의
날개에 떠 받쳐 멀리 날아가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돈키호테는
그것은 마술사
플라톤이 거인을 풍차로 탈바꿈
시켜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모레나 산에 들어가
산초에게 둘시네 공주를 찾아가
자기의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한다.
둘시네 공주란
돈키호테가 잠시도 잊은적이
없는
가상의 공주였다.
그 명령을 받은 산초는
돈키호테의 편지를 가지고
둘시네 공주를 찾아 갔다.
그리고
산초는 깜작 놀라는 것이 었다.
그 가상의 공주란 여자가
보통 남자 이상의 여장부
일 줄이야
이러한 무사 수업 도중에
산초는 끝내 자기 희망이
실현 되어 바라 타리아섬의
지배자가 된다.
산초는
그 섬을 양식으로 통치 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계속 무사 순례의 길을
중단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그의 친구
카라스코가 기사로 변창하여
돈키호테에게 도전한다.
그리고
돈키호테를 굴복시켜 앞으로
1년 동안 무기를 쥐지 않겠다고
약속을 시킨다.
우울해진
돈키호테는
병석에 눕게 되지만
결국에는 이성을 되 찾게 된다.
그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
모든 사람 에게 용서를 빌고
친구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골고루 분배해 준 뒤
경건한 기분으로 숨을 거둔다.
이 소설은
정편 52장
속편 72장 으로
되어 있다.
돈키호테는
사람으로 부터
"인간의 서" 라는 일컫어지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개의 경험 즉
이상적인 일면과
현실적인 일면을
두사람의 작 중
인물을 통하여
멋지게 표현 했다.
작가 "미겔데 세르반테스" 는
전쟁에 참여하여
왼쪽 팔을 잃었고
귀국 도중 해적의 포로가 되어
5년간 노예 생활을
일하기도 했다.
현대에 생각해 보면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 중
누가 더 필요 한가?
돈키호테 형 인간은?
실천하는 인간 이다. 하여
실천가 가 현대 에 더 필요치
않을까?
돈키호테 인간이 되려면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 볼때
어딘가에 미쳐야 하지 않을까?
맨 정신으로 이성적으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고 정의의
바다에 빠질수 있을까?
"미쳐서 살고 정신들어 죽는다"
살아서 미쳐야
자기를 버리고 정의를 위해
이 사회의 약자와 눌린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살아갈수
있지 않을까?
"좋은 나무에 붙어 살면
좋은 그늘 덕을 본다"
정직한 사내라면 모험을 찾아
해매는 편력 기사의 종자가
되는 것 보다
세상에 더 즐거운 일은
없다는 거야.
1백가지 모험 중 에서
아흔 아홉 가지가 정도에
벗어나고 조이는 법이거든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더라도
산을 넘고 숲을 뒤지고
바위를 밟고 성문을 방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는 돈 한 푼
지불 하지 않은 채
갯줏집에 묵으면서 무험을
기다리는 것은 멋진 일이야
희랍인 조르바 초크 처럼...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의 렘지 부부" 같은
두 인물이 잘 반죽 되어진
표현들이
너무 재밌고 멋지다.
"미쳐서 살고 정신들어 죽다"...
어렸을적
어르신 들 이야기속에서
잔잔하게 숨겨져 있던
단어들이 머리속에서 맴돈다.
작가: 미겔데 세르반테스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극자가.
시인 . 대표작 <돈키호테> 는
산문으로 된 서사시로 이후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 받았다.
근대소설이 뚜렷한 형태를
얻은 것도 이 작품에
이르러서였다.
미겔데 세르반테스는
하급 귀족 출신으로 태어나
여러 마을을 떠돌며 자란
세르반테스는
1570~1575년
이탈리아의 나폴리 주둔
스페인 군으로 복무하면서
틈틈히 이탈리아 문학을
접했다.
한때
해적선에 붙잡혀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그의
특별한 경험은
돈키호테 비롯한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돈키호테> 로
이름이 날리기 전까지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조차
어려웠던
세르반테스는
이 작품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말년 까지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으며
대표작 몇편을 더 남겼다.
대표작 <돈키호테> 는
산문으로 된 서사시로
이후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 받았다.
근대소설이 뚜렷한 형태를
얻은 것도
이 작품에 이르러서 였다.
미겔데 세르반테스는
1569년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이유가
당시 한 난투 사건에 가담한
결과 법망에 의해 수배된
학생이었는지의 여부는
알려진게 없어
아무튼
이탈리아로 간다는 것은
당시의 많은
스페인 젊은 이들이 어떤
식으로 든 출세하기 위해
택하는 길이었다.
그는
한 동안 로마에서
추기경 줄리오 아크콰비바
가문의 집사로 일했던것
같다.
그러나
1570년에는
스페인 왕국령이던 나폴리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보병 연대에 속해 있었으며
약 1년간 그곳에 머물다가
실전에 참여 하게 되었다.
셀림2세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는
위기에 이르렀고
투르크 인들은
1570 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투르크 선단과 베네치아
교황령 스페인 해군과의
교전은 불가피 했다.
1571녀 9월 중순
세르반테스는
마르케사호를 타고 출항했다.
이 배는
오스트리아의 후안공이
이끄는 대항적 소속으로
이 함대는
10월7일 코린트 근처의
레판토만 에서 교전에
들어 갔다.
치열한 전투는 투르크의
참패로 끝난 후
투르크는 지중해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무공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한결 같이 그의 용맹함을
임증 하고 있다.
열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남기를 거부하고
작전의 중심에 뛰어 들었으며
가슴에 총상을 2번 입었고
3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손을 쓸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항상 자랑스레 전공을
회상 했다고 한다.
1572~1575년에는
주로
나폴리에 근거를 두고
군대 생활을 계속했다.
나바리노에서도 있었고
튀니스와
라골레타의 전투에도
참여 했으며
한편으로 틈만 나면
이탈리아 문학을 접했음이
분명하다.
1575년 9월
세사 공과요한 공이 스페인
왕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지니고 스페인으로 떠난 것은
사령관으로 진급 하기
위해서 였거나 단순이 군대를
떠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레판토 전투)
이 항해 에서 타고 가던 배가
난파하여
바이에른 해적선에게
사로 잡혀
세르반테스는
형제 로드리고와 함께 당시
이슬람교도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도 노예매매의
중심지였던 알제리에서
노예로 팔렸다.
그가 지니고 있던 편지들을
발견한 노예상인들이
그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몸값이 올라가 잡혀 있는
기간도 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4번이나 탈출을 꾀하다
실패했을 때도 사향이나 고문
신체 손상등을 모면 할수
있었다.
그의 주인이었던
배교자 달리 마미와
하산파샤는
무슨 이유 때문 인지
그에게 상당히 너그럽게
대했다.
같은 시기에
알제리에 잡혀 갔던
그리스도교도
포로 사회에서도 분명히
용기와 지도력으로 명성을
얻었던 것.
로드리고가 자유의 폼이
된지 3년 만인1580년9월
마침내
그의 가족은 성심위일체 되
수도회 수사들의 도움과 중재로
세르반테스는
선망을 위한
금화500 에스쿠돈를
마련할수 있었다.
이 시기는
하산파샤가칼라 남은
노예들을 이끌고
콘스탄터노플 로 떠나기
직전 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생애 에서
가장 모험에 찬 시기로서
그의 여러문학 작품 소개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 돈키호테> 에 나오는
포로의 이야기와 알제리의
무대한
2편의 희곡(알제리의 교통)
알제리의 감옥들)
그리고 본격적인 자서전
형식으로
씌여진 적은 없지만
다른 여러 작품에 나오는
일화 들이다.
세르반테스의 작가시절
스페인으로 돌아온뒤
세르반테스는
여성의 대부분을 이전의
격동과 위험스러운
시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보냈다.
그는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하며
항상 돈에 쪼들렸던 것 같다.
< 돈키호테 > 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후의 일이라
귀국한뒤 곧 그로
물가가 올랐으며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가족과 같은
중류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현저히 떨어 졌음을 알게
되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옛 일이 되고 말았다.
세르반테스의 무훈에 대한
기록은
이제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사업에
따르는 여러 군데
행정직에 지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고작 얻을수 있었던것은
1581년 왕의 특사로 잠시
오랑에 파견 되었던것 뿐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궁정을 따라 새로이 병합된
포루투칼의 리스본 까지 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무렵 젊은 유부녀
아나데비야프린카
(아나프란카데로하스) 라는
여성과 연해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딸 이사벨 데사아베드라를 낳았다.
이사벨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고
뒤에 그의 집에서 자랐다.
그후
1584년 자신 보다
18년 연상의 여인인
카탈리아데 살라사르이
팔라시오스라 와 결혼 했다.
그녀는
라만차의 에스키비아스 마을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정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세르반데스가 어쩔수 없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할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결혼이 그럭저럭 괜찮은
동반 관계로 자리 잡았다고
보아서 안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가 당시 쓰고 있던 시나
최초로 출판 된 소설이자 새롭게
유행하던
전원로맨스(라 갈라테인 La Galatea)
1585 의 등장 인물들이
카탈리나에게 영감이나 모델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
출판업자
블라스데 로블레스는 이 작품에
1336 레알을 지불했는데
첫 작품 치고는 만족할 만한가
값이었다.
이 작품을
아크콰바바의 친구
아스카니오 콜론나 에게
헌정한 것은 후원을 얻으려는
시도 였으나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 루이스 갈베스데 몬탈보를
위시한 문학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 책은
세르반테스에게 고급 독자층
사이에서의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작자의 생전에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다시 발간 된 것은
1590년의 리스본판 과
1611년의 파리판 뿐이었다.
라 갈라테아 는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끝나 버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여러번 의사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여
애착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스페인 연극의 황금기가 막
시작 되려던 이 무렵에
세르반테스는 극작에도 손을 댔다.
1585년
카스파르데 포라스리는 극장
지배인과 2편의 글을 쓰기로
계획 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일찍이 썼던 작품중
가장 훌륭한 작품 이었다고
술회했던 혼동이다.
수년 뒤에 그는
이 시기에 20~30편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 들은
적어도 관중의 야유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것은
라누만치아(La Numancia)
알제리의 교통 2편 뿐이다.
그는
9편의 희곡을 들고 있으나
그중 몇몇 작품은
제목으로 나누어 보아 뒤에
8편의 새 희곡과 8편의 막간극
Ocho comedias .
yocho entremesesnuevos 1615년.
에 실린 작품들의 유형인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 상설 극장들이
설립되고
있었던 전에 없이 오락을 위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희곡 시장은 급성장 한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로페 데베가는
스페인 연극에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해 그의 작품에 바라면
세르반테스의 것들 까지
포함한 이전의 모든 희곡은
시대에 뒤 떨어지고 어색한 것이
되었다.
극작가로서는 실패한 것이 뻗했음에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극작품을
받아줄 지배인들을 계속 찾아 다녔다.
1587년 경에는
글을 써서는
생계를 유지 할수 없음이 분명 해져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만
된다는
그는
무적 함대를 위한 식량조달관이
되었다.
농촌에서 억지로 옥수수와 기름을
차출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결국 그것이 그의
고정직이 되었다.
일 때문에 그는
안다루시아 지방 일대를 돌아
다녀야 하고
이는 작품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미로 처럼 복잡한 재정적
문제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장부상의 수지를 맞지 못할 때에는
상관들과 거듭 반복 되는 불차를
겪었다.
또한 시나 교회 당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고 교회로 부터는
여러 차례 파문을 당했다.
문제시 된 회계와 협상의 관해서는
상당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세르반테스에게는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
그는
사라고사에서 열린 시" 경연 대회
에서 1등상(은수저3개) 를
수상한바 있었고
세비아로 돌아가 비로소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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