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들아 !
-책읽는 아이-
흰날꽃별
2013.11.
아가들아 !
만화책이라도 읽어보자.
그림이라도 보자꾸나.
그림속에는
나에 꿈이 시작 되고
또 하나의 꿈을 만들기도 하지요.
다른 하나의 생각과 상상으로
머리 Brains(뇌) 속에는
수만 갈래 길로 날 데려다 놓아
그 이상의 행동을 할수 있게
만든 답니다.
아가들아 !
-책읽는 아이- 들은
선견지명이 밝아져
미래을 짐작하는 밝은 지혜가
투철해지고 예지능력을 뛰어나게
만들어
아무리 어려운 일들이 닥쳐도
빈틈이나 부족함이 없이 제일 기초
밑바닥까지 꿰뚫어 속속들이
구석구석 깊이까지
잘 해쳐 나갈수 있는 능력이 키워지며
무슨일이든지 할수 있는 머리로
발달하여 성장 하지요.
선경지명이 뛰어 나신
우리 선조 대표할 -"이 이 "
"이 율곡선생"에 대해서
알아 보고
기를 받아 보자요?
* 이 이 -이 율곡- * -1편-
1536(중종31)~1584(선조17)
조선 문신.성리학자.
본관:덕수. 자는 숙헌.
강평공(이명신)의 5대 손.
아버지: 통덕랑 사헌부 감찰의
수운판관 역임.이 원수.
어머니: 사임당 신씨.
세째 아들로
강릉부 죽헌동의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태어날때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워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일커렀고
어릴때 현룡이라 지었다가고 뒤에
이" 로 바꾸었다.
어려서: 어머니의 신사임당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도 잘 쓰고 글도 잘지었으며 그림도 그렸다.
덕이 아주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친송을 받던
인물이다.
학문이 깊고 시와 글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 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매우 총명하였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이 이는 어려서 신동으로 불렸다. 생후1년도
안돼 말과 글을 깨우쳤고 주변을 놀라게
하였으며
3세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아니라
어머니 심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4세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 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 이"는 어머니(신사임당)의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신사임당 어머니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 된 아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낮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정정어린 기도에 탄복하였다 한다.
11세 때 아버지 이 원수가 병으로 눕자
이 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8세때는 화석장"에서 "팔세 부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 팔세부시"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시인의 시정은 그지 없어라.
불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 올라라.
산에는둥근 달이 솟아 오르고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주 병환에 눕자
이 이"와 형제들은 지극정성으로 어머니
신사임당의 병구완을 하였으며
1551년(명종6년)에 병으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 이"는 정신적으로 방황 하였는데
서모 권씨의 술주정과 괴롭힘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그는 외할머니 이씨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외할머니에게 의존하였으나
그 마저도 곧 세상을 떠난다.
그는 성주목사 노경린 의 딸 곡산노씨 와
결혼 하였고 첩 권씨 와 용인 이씨 등
몇명의 첩을 두었다.
그중 용인 이씨의 서녀에게서 얻은 딸 이씨는
그가 만년에 본 서녀로 이 이"가 죽은 뒤
그의 제자 였던 김장생의 아들 김집의
첩으로 출가 하다.
청년기.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이" 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것이 없을 정도 였으며 유교서적
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스승 없이 조광조를 사숙하다가
그는 조광조의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을 찾아가
수학 하였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우계 성혼을 만나는데
성혼은 그의 오랜 친구다 된다.
성혼은 조광조의 다른 문하생인 성수침의
아들이자 성수침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또한 고향 파주는 친구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의
연고지 이기도 했다.
청년기 이 이" 와 성혼은 시류"의 타락을 논하며
"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1567년 선조가 인재를 추천 받을때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라는 우계의
사람됨을 물었다.
선조의 물음에 율곡은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다"
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 떠받드는 인물이기 이전에 자신의
오랜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것은
비교적 냉혹한 평가였다.
그런데 선조가 이어서 "경과 우계를
비교하면 어떤가?
라고 묻자 이 이"는 " 재주는 소신이
우계 보다 자신이 낫긴 하나 수신하고 학문적은
노력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성혼 역시 이 이" 의 그러한 답변에
유감을 갖지 않고 겸허히 받아 들였다.
1551년(명종6년) 16살이 되던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 이 원수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때
따라가게 되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묘소가 있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 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그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는가 노끈으로 자살
소동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이 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 였다.
어머니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났고 죽은가 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뒤
불교에 입문 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않고 받아 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입산 경력은 그의 생전에 송은개 등의
동인들과 허목. 윤휴. 윤선도 등의
남인 당원들에게
이단 학문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상 공세를
당하는 원인이 된다.
이 이" 가 승려이며 불교도라는 동인.남인.
북인계열 유학자 들의 사상공세는
1910년(융희4년) 조선이 멸망할때 까지도
지속된다.
조광조의 직계 제자였던 그의 스승 백인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유생들과
청년들을 가르쳤고 이 이"는 스승인 백 인걸의
스승이자 자신의 사조가 되는 정암 조광조 조차
급진적이라며 거침없이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 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9) 금강산 마가연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였다.
불도를 닦았는데 그가 수행하는 중 승려들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승려 생활 내내 인간이 왜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1년 만에 마가연을 떠나
금강산에서 내려와 환속한다.
산에서 하산하며 그는 승려에게
이와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연비어약
연비어약상하동/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이치
위나 아래나 매 한가지.
저반비색역비공/
이는 색도 아니오 또한
공도 아니라네.
등한일소간신세/
실없이 한번 웃고
내 신세 살피니.
독립사양만목중/
석양에 나무 빽빽한 수플
속에 홀로 서 있었네.
불교의 무념 무욕이 그의 기질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 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때 승려로 있었다는 점은
후일 동인과 남인에 의해 인신공격의
대상이 된다.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 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 하기도 하였다.
1558(명종13) 23세의
이 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 이"는 그곳에서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이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 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는 못했지만
그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그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했다.
그 뒤에도 여려 차례 서신을 통하여
공 경공부나 격물.궁리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교류하였다.
그러나 이황을 방문하여 담론하던중 이와 기의
문제를 놓고 이황을 논파하려 드는 것을
목격한 이황의 문도을은 그를 이인으로
의아하게 보면서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는데
후일 조정에 출사한 이황의 문도들 중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 그를 스승 이황을
모욕하려 든 논적으로 규정한다.
이 이"가 질문하면 이황은 친절히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해 겨울 별시에 장원 하였는데
이 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 급제 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총 9번 장원 급제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나갈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 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성운.
남명조식 등도 찾아가 그글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 등을
담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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