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날꽃별시.창작-1

김유정 문학비 님 이시여?-2 (춘천 조각공원에서~

흰날꽃별! 2013. 6. 20. 06:46

 

 

 

 

 

      "김유정 문학비

                    님 이시여?"-2.

 

                         춘천 조각공원 에서~

 

 

 

 

      김유정. 29세

      (1908.1.18.~1937.3.29).

 

 

     *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

       일제 강정기 경성부.

 

 

        본관:청풍

        어릴때 이름 :멱설이.

        한때 잠시: 김나이

        강원도 춘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

        2남6녀의 일곱번째 로 태어났다.

        경춘선 신남역.

        (출생지-지금 종로구 운니동)

        춘천에서 태어났다는 증언은 없씀)

 

        김유정 본인은 자기 고향이 춘천으로

        생각하여

 

        "오월의 산골작이" 수필

        "나의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다"

 

       " 춘천 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 꼬불 돌아 들어 가며 내닷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 꿁찍한 산들이

        빽 둘러 썼고 그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이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 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 하고 꾸물꾸물 일만하는

        그들을 대하면 마치 딴 세상

        사람들 보는 듯하다"

 

 

    ** 김유정 어머니는

 

        김유정을 낳은 뒤 딸하나 더 낳고

        그가 7살이 되던 1915.3.18.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도

        2년 뒤 5.23.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 살림을

        도 맡아게 된 형.김유근 은

        집안에 여자들을 끌어 들이는 등

        방탕한 짓을 일삼아서 가세는 기울었고

        진골에서-관철동으로 다시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고

        그때마다 집의 규모도 줄어 들었다.

        알려졌다.

        1916.~19년 봄 김유정 4년 동안

        이웃 글방에 다니며 "천자문" "계몽편"

        "통감" 들을 배웠고 붓글시을 익혔다.

 

        12세 경선 재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에 3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4학년때 졸업할 정도로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며 1923.4.9.

       휘문고등 보통학교(5년제) 검정으로 입학

       휘문고에 입학하면서

       김유정은

       잠시 "나이" 로 바꾸었다가

       다시 본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숭인동 80번지로 다시 이사하였는데

       휘문고보에서

       안회남 "금수회의록" 의 저자

       안국선의 아들 과 친하게 지내며

       야구 축구 스케이트 권투 유도 등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감상. 바이올린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겼던 것.

       알려짐.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맞고도  끄덕 하지

       않을 정도였던 그는

       교내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3학년때 몸이 좋지 않아 1년 휴학하고

       집에서 쉴 즈음 당시 단성사 개관

       기념 행사에서 단성사에 올라

       아모니카 독주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 김유정 20살 되던 해

 

        형 김유근은  마침내 서울에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아내(김유정 형수) 와 자식들을

        남겨 둔채로 춘천 실레마을 로 낙향해

        버렸다.

        형으로 부터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 봉익동에서

        적십자 병원 의사 일을 하던 삼촌집에

        잠시 머물렀다.

        곧 형 누나들과  형수의 집을 전전하고

        했고 이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격기

        시작 했다.

        특히 휘문보고 재학 시절부터  치질을

        앓케된 김유정은 삼촌의 도움으로

        수술 받게 된 뒤에도 늑막염이나

        폐결핵 등의 병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친구 안회남에게

        "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다" 고 하소연

        하기도 했다고 한다.

        21세에 휘문보고 졸업(제21) 한

        김유정은 이듬해 인

        1930.4.6 연희 전문대학 문과에 입학

        했으나

        두달만인 6.24 학교 제적 당하고

        중퇴하고 만다.

        제적은 퇴학자 명단에 만 기록할 분

        상세 기록이 없지만

        대체로 수업 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에도 자주 결석

        하곤 하였다.

        휘문고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4살 연상의 기생(박록주)

        를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 하게 되었는데

        밤새워 편지를 써서 보내는가 하면

        혈서를 쩌서 전하기도 하고

        선물도 보냈지만 번번히 되돌아 왔으며

        직접 찾아가 구매하기도 하고

        박록주 나가는 요정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 에 탄 그녀를 끌러

        내려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김유정의 병적이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괴로워 하던

        김유정은 어느날 갑자기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앞서 김유근에게 병 치료비와 생활비을

        요구 했지만 거절 당한 상황에서 마침

        2째 누이의 동거남 이었던 매형 정씨의

       부추김 을 받아 집안의 남은 재산끼지 탕진하고

       있는형 김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승을

       내기 위한 낙향이었지만 춘천에서

       김유정의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당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기회 을

       갖게 되었다

 

 

  ****춘천에서 김유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들병이

       이리저리 떠돌며 술을 파는 여자

       들을  찾아다니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1931. 다시 상경한 김유정은

       보성 전문에 입학 했으며  그곳에서

       곧 퇴학 하고 말았다.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향 할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 감독으로

       내려 가게 되니만

       이곳에서 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 가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 마을로

       돌아 왔는데

       이곳에서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프 가 되었다.

 

       고향에서 1930~1932. 1년 7개월 을

       머물면서

       마을 청년들 모아 "농우회" 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고향집 언덕 받이에

       운막을 짓고 옛날 자신의 마름집 아들

       이었던 조경희 조카 김영수(김유근 아들)

       들과 뜻을 함께하여

       동아일보 농촌계몽운동 교재 로 야학을

       여는 본격적인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다.

       춘천 MBC 가 김유정의 탄생 100 주년을

       기념 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 에 의하면

       김유정은 민중들이 사랑하여 명문 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

       들에게도 존대말을 하였다고 한다.

       김유정이 조직한 농우회는 뒤에

 

       "금병의 숙" 이라는 이름으로 고처

        간이 학교로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그때의

        "금병의 숙" 자리에서는 면에서 운영하는

        마을 회관이 서있고 그옆에

        김유정의 뜻을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1932.6.15. 김유정은 자신의 첫 작품인

 

        "심청"을 탁고 하였다.

        이 작품은 4년뒤 1936. 조선중앙 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표지" 되었다.

       

        한펴 김유정의 형 김유근은 고향 춘천

        에서도 가산을 완전히 정리한 뒤

        그곳에 있던 조상의 무덤까지 파서

        화장해 버렸다.

        형으로 부터 "청산된 금액" 30분1 만큼의

        돈을 얻은 김유정은

        1933. 다시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이때

        나의 히스테리 증세에 그 누나에게

        얹혀 사는 건달이나 다름없는 매형

        정씨에 대한 미움까지 겹쳤는데 이것은

        훗날

        김유정의 문학세게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 졌다.

 

 

 ***** 1935. " 소낙비" 단편소설

         조선일보에

         당선 되기 2년 전에

        1933.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 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

         에 발표 하였다.

 

        "산골 나그네"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 오다가

         오두막살이에 살던 돌쇠 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에 범으로 부터 

         그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1933. 같은해 "총각과 맹꽁이" 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 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던 차

 

        1934  말 "조선일보 에 응했던 "소낙비" 는

        1등 "조선 중앙 일보 등 3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 하였고 그가운데

        "조선 일보에 응모 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 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

         을 시작하게 되었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릭 작품

        대부분 발표하였다.

 

       "금따는 콩밭" "금" 떡" "만두방"

 

       "산골"  "솟"  "봄봄"   "안해"

 

        등에 단편 10편 과 수필 3편

 

       그 가 등단한 바로 그 해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등이

       그 소설의 주요 모티브였다.

       문단에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

       로써 는 휘문고보 때

       부터 동창 이었던 안희남 말고도 사직동

       매형집에서 살때 앞뒷집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신 양면으로 도움을 줘었던

       이석훈 있었고 이석훈이 소개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된 이상 도 있었다.

       1937. 똑같이 "남생이" 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 등단한 혁덕 도 

       김유정의 문우 였다.

 

       1934.김유정 사직동 -혜화동 으로 이사

       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식객 살이를 시작

       김유정 에게는 무수히 많은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 어 왔고 김유정 자신도 약값을

       벌기위 해 청탁이 오는대로 글을 썼으며

       술 값으로 써 버리기 일수였다.

       여성" 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 을 맞이 할까"

      

       라는 글과 나라히 실린 박봉자

       (시인 박봉철 의 여동생) 으 글을 읽게된

       김유정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 라는

       여인을 향해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을 썼지만

       답장은 한통도 오지 않았을뿐 아니라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의 박봉자가 약혼 했으며

       곧바로 결혼 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된다.

      

 

 

******1936. 가을~겨울 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악화 되어 고생 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매형 유세준

        다섯째 누나의 (김유흥의 남편)의 집으로 갈

        정도 로 조카에 대한 애정을 쏟았던 김유정은

        죽기 11일 전인 3.18.에 방안에 커튼을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

 

        이라는 제목의 이글에서

        김유정은 최후의 순간 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않고 있다.

 

       "필승전"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렬하다.

       아무리 생각 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몸이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 말로 일어 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 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

 

       나는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내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꾸워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 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해친다 그러나

      그병을 위하여 엎집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을 십여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역사속에

                     작가 "김유정"은

                     춘천 조각공원

                     김유정 문학비 쳐다 볼때

                     보다 더더 슬픔이 더해져~

                     실랄 같은 나날의 시간

                     삶 들이  나에 가슴을

                     찌져지게 만들었다.

 

 

 

                 " 김유정 문학비

                                   님 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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