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선생(본명;홍연후) 생가
봉선화... 고향의 봄. 작곡한
...뿌리를 찾아서 떠나다.
-흰날꽃별-
2022.6.29.
홍난파 선생 태어난 고향을
솔직히 난 몰랐다.
청년시절에는 알았었을텐데
아마도
세월 흐름속에...
봉선화... 고향의 봄.
어떻게 작곡 했을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활초리(현 남양읍)
고향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득 찾아 나섰다.
그곳에 도착해 사진을 찍어가며
둘레를 돌아 보니
봉선화... 고향의 봄 작곡한 노래가
곳곳에서
들릴듯한 풍경들이
2살때 이사를 했다지만
커가면서
고향을 찾아 갔을때 마다
홍난파 선생은
깊은 어린 순수한
감성들이 그대로 표현
되었을거라
생각이 들면서
아마도
시골길에 아늑하고 포근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고향의
선율이 풍경속에서 잔잔하게
떠올랐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이면
산 허리에서 나오는
운무와 작은산 곁... 결 마다에
동네 마을들이
잘 어울어져 ~물결처럼 춤쳐오는
풍경속에 정말 동요적인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집 앞뜰 마루에 석양속에 바다도
보였을 테고.
동서 남으로 조근조근 마을들에
풍경들이 아기자기 아름답기도 했을곳.
살구나무. 복숭아꽃. 울밑 봉선화 꽃속에
나도 모르게
봄이면 봄.
가을이 되면 밤나무와 푸른 대나무와
이산 저산 울긋불긋 아름다운 가을색
풍광들이...
겨울속 눈꽃 마을들이
계절마다 바뀌어 오는 풍경들을
상상하게 하는 곳.
가득해 보이는
지금도
여름날에 살구가 황빛노랗게 익어서
옛적 반가운 우리에 간식이었던
생각이 난다.
밤나무에는 풍성하게 쭉쭉 늘어져
피어 있는 밤나무꽃 저절로
행복을 느끼게 한다.
이곳 저곳 개구장이 아이들 곳곳...
마을속에서
튀어 나올듯한 행동과 소리들이
들릴것만 같았다.
봉선화... 와 고향의 봄.
나에 살던
고향을 생각하며
그시절은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았겠구나....
고향 같은 마을...
생각에 잠겼다.
봉선화
-홍난파-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 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들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냥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제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봄처녀
-홍난파-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 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길에 내 집앞을 지나 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 인가
미안 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홍난파. 홍연후. 나소운.
출생. 1898.4.10일.
사망 1941.8.30일.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봉선화... 고향의 봄. 애수의 조선.
성불사의 밤. 봄 처녀. 로맨스. 조선의 애수.
동양풍무곡. 조선동요백곡집. 약전대요.
본관은-남양. 본명은-홍 연후 이며
필명으로는 나소운.YH생. 도례미. 도레미생.
ㄷㄹㅁ.솔파생. ㅎ ㅇㅎ. 등 사용 하였다.
아버지는 홍준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 씨.
형은 한국에선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
1898.4.10.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 에서 태어 났다.
2세때 서울 정동 으로 이사 했다.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두가 설립한
새문안 교회에서 1892년에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두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의 한글성서 번역 작업에
참가하였으며
언더우두의 조선어 선생 이기도 하였다.
아버지 영양으로 어릴때 부터
새문안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음악을
접하였고 서양음악에 입문 하였다.
어릴때 한학을 수학 하였고
시립 영신소학교를 다녔다.
1910년 9월
중앙 기독교 청년회(YMCA)
청년학과 중학과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 하였다.
YMCA를 다니면서 1911년 두번의
세례문답식을 거쳐 입교 하였다.
그의 절 친한 벗 이관구도 같은 시기에
YMCA와 새 문안 교회를 다녔다.
청년학과에 다니면서 1912년 최초의
정문음악기관인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하며
1913년 4월 2회 졸업하였고 다시
같은 학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부 기악과
들어가 1년 동안 김 익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운후
1914년 졸업 하였다.
다음 해인1915년
서양학부 교사로 임용 되었다.
1년후 정동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여
의학 공부를 하였으나
음악으로 뜻을 굳히고
1918년4월 관립 도쿄 음악학교
(일명노예부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서
1919년3월 수료 하였다.
같은해 2월 부터 일본에서
음악. 미술.문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 을 창간하여 편집인겸,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음악계" 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잡지다.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음악 활동을 하였다.
1924년1월19일
YMCA 강당에서 독주회를 열어
"애수의 조선"을 비롯 하여 "하야의 성군"
"로맨스" "라단단조가보테" 등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발표하였고
5월11일 연희전문학교 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6월14일 경선의전 음악부의
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1925년 10월.12월24일. 11월16일.
12월10일. YMCA에서
수화례음악 연주회를 갖는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6년3월
도쿄 고등음악학원(현 구나다치음악대학)
선과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로 진학하여
1929년3월 졸업하였다.
도쿄고등음악학원에 재학중이다
1928년 도쿄신 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 하였다.
귀국후
1931년9월 미국으로 유학 갔다.
1931년9월
미국 시카코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해서
1932년6월. 졸업하면서 다니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 에
가입 하였다.
미국에서 귀국후
1933년4월. 경성 보육학교
음악 주임 교수로 부임하였고.
홍성유. 이영세. 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삼중주단(난파트리오) 을 결성 해서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6월4일 메이지 제과점 3층 홀에서
첫 연주회를 가졌고
9월15일 YMCA 강당 에서
2회 연주회를 갖는등
1936년까지
4년간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하였다.
1936.6월 일본 빅타(Victor)
측음기 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을 겸하였고
1935년9월 부터 1936년 3월 까지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 하였다.
1937년11월 경성 중앙 방송국
방송 관현악단 지위자로 위촉 되었다.
일찍 부터 작품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동요-
"봉선화 1920. 고향의 봄 1929. 등
기악곡-
"애수의 조선 1927. 등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였다.
"악전대요 1916.4. 같은 음악 관계
서적과
"조선 동요 100곡집 (1929.10.
1930.4. 1933.10.)
같은 작곡집을 발표 하였다.
장편 단편소설을 집필해
처녀혼" 1921년. 발표 하였고
번역서로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 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 1923년과
에미졸라 원작 "나나 1924 등을
출간 하였다.
이 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글을 평론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7년 동우회 사건을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단체에 가입하였다.
1937년5월
친일 문단인 조선문예지회에 위원으로
참여 하였다.
같은해 6월
미국 유학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동우회 사건" 에 연루 되어
고초를 치렀다.
9월 매일 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 문예회가 후원한
바오딩 함락 축하
황군 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곡작품인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 를 발표하고
2부 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10월 경성 고등학원시 주최하고
경성 군사후원 연맹 과
경기도 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음악 악보국대연주회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였고
출연자 수익금 모두를 일제의 침략 전쟁
을 위한 국방 헌금에 헌납 할것을
결의 하였다.
같은 달인10월
동우회 사건이 기소유예처분을
받았고
11월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입한것을 후회하며
일제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했다고
맹세 하였다.
1938년 천황의 본분을 받들어
필굉일우로 만들자 는
"희망의 아침" 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1집 을 발표 하였다.
이 노래는
일제의 가창 지도곡으로 선정 되었다.
1938년6월
사상전향자를 회원으로 하면서
반공을 내세운 대당 민우회에
동우회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가입하였고
전향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경성 중앙 방송 관현악단 지휘자로
지원병 징병을 선전하고
침약전쟁을 미화하는 노래를
연주 하였다.
1939년10월
라다오로 방송된 "애국가 프로그램 에서
"대륙행진곡 "황국 정신으로 돌아가
"애마진군가 "부인 종군의노래 등
지휘 하였으며
11월
"바다로 가며 "기념식 행진곡
"애국 행진곡 등과
12월
"태평양 행진곡 등 을 연주 하였다.
1940년11월
기원 2600년 봉축 기념 현상 당선곡인
"순정의 꽃장사 를 가곡 하였고
1941년1월
조선 음악협회 결성 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 되었으며
1월29일에
국민총력 조선연맹 문화부회의 에서
문화의원으로 선임 되었고
2월에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국민총력의 노래" "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
"열사의 맹서" 등 연주 하였다.
8월 30일
경성요양원 에서 사망 하였다.
1965년10월
문화 훈장을 추서 하였다.
홍나파 선생 생가. 봉선화... 고향의봄. 뿌리를 찾아서...
고향의 봄.
홍난파 선생 작곡. 이원수 작사.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곷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 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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